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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다시, 심리학으로 영화를 #4 - <위대한 쇼맨>

by 대한민국청소년의회 2020. 7. 25.

네이버 영화 | 위대한 쇼맨 | <위대한 쇼맨> 공식 스틸 이미지

<위대한 쇼맨>이 영화관에 돌아왔다. 2017년 개봉해 전 세계를 사로잡았던 뮤지컬 영화가 2년만에 재개봉한 것이다. 


영화의 식지 않은 유명세 덕분인지 재개봉 이후 연일 국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기에 이번 상영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 19 (이하 ‘코로나 19’)사태로 인해 침체기를 맞은 한국 극장가가 내놓은 강수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제작사가 속편을 만들 것까지 공식화한 상태이니만큼 우리 곁으로 돌아온 이 영화를 다시 분석해 보자. 또 그와 더불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시네마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간단한 고찰을 진행해 보자.

 

<위대한 쇼맨>은 전기적 성격을 띤 뮤지컬 영화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서커스’의 개념을 창시한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그의 일생과 꿈을 따라가는 이야기를 구성하였다. 


극중 바넘은 세상 사람들이 전부 웃고 즐길 수 있는 쇼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세상의 기인들과 재능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공연을 제작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사회적 질타와 개인적인 어려움, 그리고 사랑과 우정은 104분의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 자연스럽게 압축되어 관객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실존 인물로서의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에 관한 논란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위대한 쇼맨>이 완전한 전기 영화나 다큐멘터리가 아닌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미화나 각색이 있었다는 사실은 영화 자체의 질적 측면을 논할 때에는 그렇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맞아 보인다.


그렇다면 영화의 세부적인 내용들에 적극적으로 차용된 심리학적 요소들을 살펴 보도록 하자. 


첫 번째는 바로 학습된 무기력(learned helplessness)이다. 이는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지난번에도 다이어트에 실패했으니 아무리 환경을 바꿔도 다시 실패할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 더 나아가면, 자신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사건들 사이에서도 복합적 관계를 파악하려고 하며 비관적인 미래를 억지로 예측하기까지 한다. 


<위대한 쇼맨>에 등장하는 바넘의 서커스 단원들은 주로 초반부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 자신들의 신체적 특성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매도되고 따돌림 받던 단원들은 처음 바넘에게서 서커스에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선뜻 기뻐하지는 않는다. 


작중에는 묘사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받았거나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관점이다.


심리학의 한 분파인 긍정심리학(마틴 셀리그만 창시)에서는 학습된 무기력과 반대되는 개념인 학습된 낙관성(learned optimism)을 주장한다. 비슷한 개념이지만 지속적인 환경의 변화로 낙관성 또한 학습될 수 있다는 것. 


본작에서도 이러한 학습된 낙관성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처음에는 쇼의 가능성은 물론 바넘의 진심에도 의문을 품었던 단원들이, 바넘이 파산한 후에는 그의 곁을 지켜 주면서 더 진취적인 사고를 하는 면에서 볼 수 있다. 


학습된 무기력과 학습된 낙관성 개념을 자유롭게 차용하고 완급을 조절하면서, 다수의 캐릭터들을 순식간에 입체적인 인물의 위치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위대한 쇼맨>의 거시적 심리 조절은 가히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바로 쾌락(pleasure)과 만족(gratification)이다. 


쾌락이라는 단어는 어느 정도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있지만, 심리학에서 다루는 쾌락은 필요 없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어느 정도는 추구해야 하는, 인간의 삶에 필수불가결적인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쾌락은 감과 정서에 관한 것이고, 만족은 개인의 강점과 미덕의 실현을 추구하는 것이다. 


극중 묘사되는 바넘의 서커스는, 화려한 무대와 음악으로 관객들에게 쾌락의 정수를 선사해 준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바넘이 비난받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데, 문화평론가 베넷이 작중에서 그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바넘이 ‘가짜 웃음을 팔고 있다’라고 지적하며 그의 공연을 예술로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예술의 정의를 생각해 보면, 그 본질은 쾌락을 전달하는 대에 있는 것이 많다. 그저 바넘의 쇼는 그때까지 전례가 없던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쾌락을 제공하였기에 낯설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은 다양한 미사여구나 치장으로 쾌락의 추구를 감추고 있기에 노골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바넘의 공연은 다소 황당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대립 관계에도 쾌락 개념의 연장선상으로 ‘절정-대미 이론’이라는 개념이 있다. 바로 쾌락의 경우 그 지속되는 시간과 관계없이 쾌락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리고 끝날 때를 가장 잘 기억한다는 이론이다. 


그런 면에서 <위대한 쇼맨>의 극중 마무리는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바넘의 쇼를 총 3~4번에 걸쳐서 관람한다. 영화의 다른 노래들과 달리 바넘의 공연이 직접적으로 연출되는 장면은 아주 극적이어서, 카메라와 연출의 텐션이 짧은 시간 안에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그렇다면 실제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를 가장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바넘의 쇼를 영화의 마지막에도 배치하는 것이다. 이것을 의식하기라도 한 듯 서정적으로 끝나도 될 듯한 <위대한 쇼맨>은, 바넘이 자신의 후계자이자 동업자인 칼라일에게 공연을 넘겨 주며 완성되는 마지막 하나의 쇼로 그 결말을 마무리한다. 


심리학적 요소의 적극적인 사용으로 서사에 정당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일반 관객들의 눈까지도 사로잡은 것이다. 마치 ‘흥행의 공식’을 아는 사람이 만든 것처럼.


 뜻밖의 재개봉으로 인해 관객들은 이렇게 심리학적으로 잘 구성된 영화인 <위대한 쇼맨>을 다시 한 번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재개봉의 이유가 코로나 – 19로 인한 전세계적 감염병의 확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니다. 영화 산업은 온라인 시장을 주목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영화관이라는 장소의 존폐를 걱정하기까지 한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포스트-코로나 시대에서 시네마는, 영화는 어떠한 역할을 차지하게 될까? 언택트 시대가 출발함에 따라서 영화가 혼자서 즐길 수 있는 여가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를 소통의 수단으로 발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일까?


영화관은 가장 개인적인 공간이자 가장 사회적인 공간이다. 


모두가 서로를 개의치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를 보지만, 동시에 사람이 없으면 상당히 허전한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관의 존립 여부는 어떻게 될 것이며 디즈니+, 넷플릭스 등 다양한 스트리밍 서비스가 급성장하는 현 세대에서 고전적인 ‘시에터(Theater)’의 역할은 무엇일 될 것인가? 


일각에서는 그 규모가 작아지되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바넘의 서커스도 그 규모는 작아졌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천막형 서커스를 진행하고 있고, 연극과 뮤지컬, 오페라로 이어지는 극 산업도 주류 문화에서 밀려났을 뿐 여전히 건재하다. 


아마 언택트 시대가 완전한 수준으로 도래한다면, 영화관 역시 그러한 길을 걷지 않을까? 


바넘이 칼라일에게 쇼를 물려주었듯이 영화관이 스트리밍 서비스들에 쇼를 잘 물려주는 그 과정이 중요할 것이다.


대한민국청소년의회 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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